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 전투 (문단 편집) ==== 명나라군의 학살 소문 ==== 한편 전투 이후 명군이 1만명에 가까운 평양 백성들을 학살해 수급을 베고 남은 시신은 대동강에 버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전투에서 남쪽의 군사들이 날래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이들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의 사상자도 많았으며 굶주려 부르짖으며 피를 흘리는 자가 길에 잇따랐다. 뒤에 산동 도어사(山東都御史) 주유한(周維韓)과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 양정란(楊廷蘭) 등이 올린 주본(奏本)에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 중국 조정에서는 이를 인하여 포정(布政) 한취선(韓就善)과 순안(巡按) 주유한 (周雀翰) 등으로 하여금 직접 평양에 가서 진위를 조사하게 하고, 또 본국도 사실에 의거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도 변명을 하였다(선조 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1일 병인 13번째 기사) 하지만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3개월 뒤의 기록 때문이다. >처음 평양부와 개성부가 수복되고 나서 '''이 제독은 대대로 북쪽 지방에 살았으므로 군대를 쓰고 공을 논할 때에 모두 북군(北軍)을 우선하고 남군(南軍)을 뒤로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남군과 북군 사이에 불화가 생기니, 군중에 뜬소문이 퍼지기를''' ‘제독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에 조선 백성들을 많이 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목을 베어 적의 수급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사실이 중국 조정에 알려지자 중국에서는 포정(布政) 한취선(韓取善)을 파견하여 군사(軍事)를 조사하게 하였다.(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21일 을사 2번째기사 ) 그러니까 [[이여송]]이 북쪽 지방 출신이라 북군의 공을 우선시하고 남군을 홀대해서, 불만을 품은 남군 병사들 사이에 이여송을 비난하느라 조선 백성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소문이 정말인지 알아보기 위해 명나라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확인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자문 답변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가 오랫동안 왜적의 침략을 당해 3도(三都)가 함락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황제께서 군사를 일으켜 구원해 주었습니다. 이 제독은 천자의 명을 공경히 받들어 대군을 통솔하고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흉악한 왜적을 소탕하였습니다. 그는 적을 참살하는 소란한 가운데서도 반드시 먼저 우리 나라의 백성들을 가려서 내보내어 살게 해주었는데, 그 수효가 이미 1천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진영에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을 경계시켰으니 그의 신중함이 이렇듯 극진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신민들이 고맙게 여겨 마지 않는 것은 역시 목숨을 구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문에서 말한 ‘불에 태우고 물에 빠뜨려 잘못 죽였다.’는 말은 '''근거 없는 헛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매우 사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적을 사로잡고 수급을 벤 것은 분명하게 조사해 올린 것'''이니, 실제의 수효보다 과장해서 보고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당직(當職)이 변변치 못하나 어찌 차마 스스로 속여 배반하는 죄에 빠질 리가 있겠습니까.(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21일 을사 3번째기사 ) 한마디로 조선 조정에서 이 소문을 직접 부정했다. 당연히 이여송도 처벌받지 않았다. 4차 평양성 전투는 명나라 단독으로 치른 전투가 아니라 조선군도 만명 넘게 참전한 전투다. 정말로 명군이 조선 백성을 만 단위나 학살했다면 조선군 병사들이 보고만 있을리는 없으니 충돌이 있는게 당연하고, 이런 중요한 보고가 조정에 올라오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당시 [[평안도]] 체찰사였던 [[류성룡]]이 평양성 탈환에 대해 올린 장문의 보고서[* 심지어 류성룡의 보고서에는 평양성 탈환에 대해 크게 유쾌하게 생각한다고 썼다.]에도 오히려 구출한 남녀 포로가 1천 15명이라는 기록만 있지, 명군의 학살 같은 기록은 없다. 설사, 조선 조정은 명나라 눈치 보느라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보는 눈이 저렇게나 많았으니 학살이 있었다면 세간에 안알려졌을리가 없는데, [[난중잡록]]이나 고대일록같은 의병장들의 사료에도 명나라군의 학살 기록은 없다. 특히 [[고대일록]]에는 4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있고, 명나라군의 약탈과 횡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 백성들을 학살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들면 1593년 7월 14일 "명나라 군대가 군(郡)에 가득하고 주민은 텅 비었으니, 긁어모으는 피해가 왜노(倭奴)와 다를 바 없다." 이처럼 고대일록에는 명나라 군대에 대한 악평이 한가득이라 명군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학살 기록은 없다.][* 그런데 작가 [[김탁환]]의 소설인 [[불멸]]에서는 명군이 평양성에서 조선 백성들을 마구 학살하며 악마처럼 낄낄거리고 있는 장면을 태연하게 집어넣었다! 하지만 [[불멸]]이 원작이 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비판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김탁환]]은 고증을 엉망으로 하기로 악명이 높기에,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